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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5시 동유럽의 골목을 걷다>를 읽고... |
| 책 읽은 후 | 2009/05/15 23: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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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흠의 <오후 5시 동유럽의 골목을 걷다>와 손영운의 <우리 땅 과학 답사기>. 지난 주 내가 구입한 두 권의 여행서이다. 여행서 구입은 내게는 아주 이례적인 일이다. 손영운의 <우리 땅 과학 답사기>를 구입한 것은 내가 살고 있는 연천(漣川)은 물론 내 관심의 대상지들인 충남 태안, 전북 부안, 전남 해안, 강원 평창 등의 지질학적 이력이 소개된 책이기 때문이다. <우리 땅 과학 답사기>는 사실 풍광이 수려한 산이나 바다, 강 등을 소개한 책도 아니고 먹을 거리를 중심으로 여행지를 소개한 책도 아니다. 다만 과학적 근거들을 알려주는 책으로 분류해야 마땅하므로 내가 구입한 본격 여행서는 이정흠의 <오후 5시 동유럽의 골목을 걷다> 한 권인 셈이다.
한편 <오후 5시 동유럽의 골목을 걷다>는 그저 멋진 해외 여행지 소개에 초점을 둔 책이 결코 아니다. 한때 서유럽이 내 동경의 대상이었던 적이 있었지만 지금은 프라하가 있는 체코, 소피아가 있는 불가리아 등 동유럽이 내 마음을 물들이고 있다. 내가 동유럽 특히 프라하를 좋아하는 것은 프라하가 중세의 신비를 간직한 도시이며 유명한 문인, 작곡가, 영화감독 등을 낳은 유서 깊은 땅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서유럽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난한 데다가 우울이 깃든 곳이기 때문이다. 저자 역시 “사회주의 국가들이었고 전쟁을 겪었으니 뭔가 다른 걸 볼 수 있겠다 싶었다.”는 말을 했다. 바흐, 슈만, 브람스, 엘가, 라벨, 드뷔시, 알비노니, 마르첼로 등의 서유럽 작곡가들의 음악을 듣다가 드보르작이나 야나체크 등의 음악을 들으면 사실 묘한 이국 정서가 느껴진다. 우울과 이국 정서란 체코 특유의 아우라로 환원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저자는 “상처의 역사는 끝없이 자신을 우울케 했지만 또 그것을 딛고 활기차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는 말을 했고 나 역시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근 출간된 <프라하가 사랑한 천재들>이라는 책에서 작가 카프카와 밀란 쿤데라, 영화 감독 밀로스 포먼, 작곡가 드보르작, 스메타나, 정치인 바츨라프 하벨 등이 소개되었는데 <오후 5시 동유럽의 골목을 걷다>의 체코 프라하 편에서 소개된 사람들 역시 대동소이했다. 같은 체코 출신인 레오 야나체크가 두 책 모두에서 소개되지 않은 것이 의아하다. 아무튼 <오후 5시 동유럽의 골목을 걷다>를 읽으며 나는 좋은 여행서의 요건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앞서 가난과 우울에 대해 이야기 했지만 동유럽에는 유고 내전 등의 전쟁의 상흔은 물론 독재, 공산주의 체제로 인한 아픈 흔적이 곳곳에 배어 있다. 그렇기에 저자가 여행지에서 겪은 소매치기나 바가지 요금, 육체적 고생 등은 사실 사소한 문제 이상은 아니다. 동유럽은 마냥 화려하기만 하고 마냥 신비하고 낯설기만 한 것이 아니라 어디에든 있는 아픔과 고난의 역사가 함께 서린 곳이고 이런 요소들에 지면을 할애하는 것이 좋은 여행서의 필요조건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이점이 내가 <오후 5시 동유럽의 골목을 걷다>로부터 배운 점이기도 하다.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코소보,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마케도니아 등으로 나뉜 옛 유고 연방편을 읽으면서는 오래 전 읽은 고종석의 <기자들>을 다시 떠올리기도 했다.
적어도 옛 유고 연방 부분을 읽을 때 느껴진 <오후 5시 동유럽의 골목을 걷다>는 역사서인 동시에 전쟁을 다룬 간략한 책이었으며 집단 속 인간의 탐욕과 맹목. 무지 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회과학 서적이기도 했다. 특히 나치의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위치했던 풀란드, 밀로세비치가 악마성을 극악하게 드러냈던 옛 유교 연방이나 차우세스크 부분에선 기독교에서 말하는 종교적 의미의 악(惡)에 대해서까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악의 무한 팽창을 바라보며 기독교의 전능자는 왜 악을 보고만 있는가, 하는 옛 의문을 다시 꺼내 들기도 했다.
미국의 진보신학자이자 목사였던 라인홀드 니버는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에서 “지금까지 겪어 온 모든 세기 동안 사람들은 악에 물들지 않거나 서로 이전투구하는 일 없이 잘 어울려 사는 법을 익히지 못했다.”는 말을 했다. 우리는 이 난제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제 좋은 여행서의 필요충분조건은 무엇일까, 란 질문을 던진다. 그것은 남다른 안목의 깨달음을 주는 책이 아닐지? <오후 5시 동유럽의 골목을 걷다>가 깊은 사색 거리들과 역사적 무게감을 느끼게 해 준 책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저자 특유의 남다른 시선이 보이지는 않는다. 그래도 수많은 책들을 참고해 여행국들에 대해 충분히 공부하고 나선 준비성은 높이 살만했고 탄탄한 문장력과 무게감이 돋보였다. 언제나 마음 편히 여행을 할 수 있을까 싶은 마음에 여행서적을 사지 못했지만 앞으로는 가끔이나마 좋은 여행서적들을 살 수 있게 해준 저자에게 감사한다.(<오후 5시 동유럽의 골목을 걷다>는 인터넷 교보문고의 반값 할인 코너를 통해 산 책임을 밝혀 둔다.) |
anuloma01
2009/05/15 23:39
2009/05/15 2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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