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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세상과 다투지 않는다>를 읽고... |
| 책 읽은 후 | 2009/05/16 10: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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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산님 버전의 <금강경> 해설서인 <나는 세상과 다투지 않는다>를 읽었다. 책을 읽으며 불자가 아니면서 불교 책을 읽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물론 이번 읽기는 <금강경>에 관한 이해는 물론 오해에 대해서까지도 내 나름의 시각으로 밝힘으로써 사상의 지평을 풍요롭게 하기 위한 읽기라 말하고 싶다. <나는 세상과 다투지 않는다>는 붓다를 신격화하고, 붓다가 설한 금강경의 가르침을 신비적으로 받아들이는 세간의 흐름에 조용히 이의를 제기한 책이다.
신용산님은 곳곳에서 불교 전반에 대해 예사롭지 않은 해석을 가했다. 그가 내린 인상적인 해석들 가운데 결코 빼놓을 수 없는 하나는 ‘정신세계’를 나타내는 불교의 27천(27天: 욕계 6천, 색계 17천, 무색계 4천 등)이 죽음 후에 가는 지옥과 인간, 그리고 천상의 어딘가에 있는 세계 등으로 뒤바뀌었다고 말한 대목이다.(60페이지, 171 페이지, 212 페이지) 심리상태를 나타내는 개념에서 장소를 의미하는 개념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이는 붓다가 사후 윤회(輪廻)나 전생(轉生)을 주장하지 않았다는 암베드카르의 주장과 비교할 부분이다. 암베드카르의 주장이 정치적 의미를 지닌 것이라면 신용산님의 해석은 교리 내적인 의미에서 나온 주장이다.
<금강경>의 가치는 보시 - 저자는 보시 중 가장 공덕이 높은 보시를 법보시라 밝혔다. -를 한다는 인식마저 벗어버린 채 하는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를 가르친 것이라 한다. 하지만 저자가 인용한 여러 금강경 관련 책들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금강경역해>를 쓰신 각묵스님을 비롯한 여러 저자들은 <금강경>의 핵심은 무아(無我)를 강조한 데에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무아(無我)인데 어떻게 윤회가 가능한가란 의문이 들 것이다. 이에 대해 불교의 전통 입장은 마음의 에너지가 찰나생 찰나멸(315 페이지)하는 과정을 통해 흐름으로 이어진다는 말을 한다. 저자는 책의 뒷 부분에서 찰나생 찰나멸을 특징으로 하는 마음을 마음의 무상성(無常性) 및 무아성(無我性)으로 풀어냈다.
들뢰즈는 <니체와 철학>을 통해 ‘변증법적 사유에서 다양성은 이성적 원리의 통제 밑에 조정되어 등장하며, 결국 동일성의 구성 요소로 해소되어 버린다. 다양한 개체는 최후의 긍정을 산출하기 위해서 이용당한 후 결국 부정된다.’는 말을 했다. 변증법에서 다양한 개체들은 최후의 긍정에 참여하지만 결국 부정된다는 것이다. 불교의 마음論에서 마음은 찰나생했다가 찰나멸한다고 하지만 변증법에서와는 다르게 소멸하지 않고 기독교의 영혼처럼 ‘나 없는’ 윤회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저자는 환생이나 윤회는 그것이 자아이든 그 밖의 무엇이든 업(業)을 전달할 매개체가 있어야 가능한데 붓다는 그런 매개체의 존재를 부정했다고 말한다.(71 페이지) 일반적으로 파동을 전달해주는 물질을 매질(媒質)이라 한다. 예컨대 소리란 공기가 퍼져 나가는 것이 아니라 파동이 퍼져 나가는 현상이다. 공기가 퍼져 나가는 것은 소리가 아니라 바람이다. 바람이 없어도 소리는 퍼져 나간다. 소리의 매질은 공기, 물결파의 매질은 물, 지진파의 매질은 땅이다. 그렇다면 무아이기에 늘 새롭게 태어난다는 마음의 파동(또는 마음이라는 파동)을 전달해주는 물질 즉 매질은 무엇일까? 아니 그런 것이 있기라도 한 것일까?
본래에서 벗어난 여러 붓다觀들 가운데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은 붓다를 신(神)으로 보는 것이다. 이로 인해 등장한 것이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 등의 3신설이다. 장로(長老)교단은 붓다를 신으로 보는 것에 극구 반대했지만 대중과 타협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에 따라 3신설이 탄생했다.(75 페이지) 한편 불교에도 가현설(假現說)이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게 다가왔다. 역사적 예수를 부인하는 과정에서 기독교에 가현설(假現說)이 등장한 것처럼 불교에도 역사적 붓다를 부인하고 신격화하기 위한 과정에서 가현설(假現說)이 등장한 것이다.(76 페이지) 칸트는 ‘순수 이성’ 은 결코 영혼과 세계와 신을 인식할 수 없다는 전제하에 도덕적 요청에 의거해 신앙의 영역 즉 ‘실천 이성’의 영역을 개척했다. 대승에 의해 붓다가 신격화되지 않았다면 지금의 불교는 어떤 모습을 띄고 있을까? 자신을 숭배하지 말고 스스로를 의지하고 법을 귀의처로 삼으라는 붓다의 가르침과 다르게 붓다가 신격화된 사건을 보며 나는 신격화는 결국 도덕적 요청에 의거해 신앙의 영역 즉 ‘실천 이성’의 영역을 개척한 칸트의 경우와 같은 차원일까, 하는 궁금증을 갖는다.
붓다 입멸(入滅) 후 사리가 배분된 과정 역시 전술한 사례들처럼 일상의 비근한 예로 설명 가능할 것이다. ‘독일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죽은 스위스 시민권자’(에른스트 페터 피셔 지음 <슈뢰딩거의 고양이> 366 페이지)가 누구인지 맞춰 보라면 사람들은 과연 누구라 대답할까? 답은 아인슈타인이다. 아인슈타인을 과연 어느 나라 사람으로 분류해야 할지 난처한 감이 드는데 붓다 입멸 후 자신들에게 사리를 모셔갈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 사람들이 내세운 근거들을 보면 마치 아인슈타인의 정체성에 관한 난처함을 다시 보는 듯하다. 붓다 입멸 후 붓다의 사리를 차지하려고 한 사람들은 각각 ‘붓다가 자신들의 거주지에 속한 죽림정사에 가장 오래 머물렀다’(마가다)는 이유와 ‘붓다와 혈통이 같다’(카필라밧투)는 이유, 그리고 ‘붓다와 같은 계급’(바이샬리의 릿차비족)이라는 이유들을 내세웠다.
물론 사리는 균등 분배되었지만 사리탑은 불상으로 발전(?)하고 만다. 나는 여기서 발전이라는 말을 썼지만 이를 과연 어떻게 보아야 할까? 에드워드 콘즈(Edward Conze)는 <한글세대를 위한 불교: 원제는 Buddhism - its essence and development>에서 종교형성의 첫 단계에서 교리적, 교단적 활동의 방침을 설정해 나간 사람은 창시자가 아닌 제자 가운데 하나라는 말을 했다.(130 페이지) 콘즈는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경우 성(聖) 프란치스코 자신이라기보다 코르토나의 엘리아스이며, 제수이트 교단의 경우 로욜라의 성(聖) 이그나티우스라기보다 라이네즈라는 말을 했다. 이 밖에 콘즈는 예수에 대한 성(聖) 바울, 마호메트에 대한 아부 베크, 플라톤에 대한 크세노크라테스 등의 추가적인 예를 들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초기 불교에 대한 북방 불교(대승불교)를 또 다른 하나의 예로 들을 수 있을까? 저자는 대승의 논리가 붓다의 가르침을 위배했다기보다 그 분의 가르침을 더욱 확장하고 고양시키는 역할을 해왔다는 말을 한다.(252 페이지) 이는 저자가 윤회를 살아 있을 때의 일이라 말하면서도 사후에 가는 장소와 관련한 의미로 바뀐 윤회사상이 내세의 과보를 기대하게 하는 신앙생활의 동력이 되었다고 한 것과 연관지을 수 있는 부분이다.(173 페이지) 물론 그로 인해 불교의 교세가 커지고 교리가 풍부해졌지만 기복 신앙과 힌두적인 윤회 사상에 물든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제 금강경은 물론 불교 전체의 하이라이트라 해서 지나치지 않을 내용을 소개할 때가 된 것 같다. 그것은 일체(一切)가 무엇인가에 대한 붓다의 대답이다.(47 페이지) 붓다는 일체를 12입처(入處)라 말한다. 즉 일체란 눈과 형상, 귀와 소리, 코와 냄새, 혀와 맛, 몸과 감촉, 의식과 법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느낀 것을 종합하여 바깥 세상을 인식할 때 비로소 내게 세상이 존재한다는 말을 한다. 지나친 흥분인지 모르지만 나는 이 부분과 “인식 주체가 인식 질료를 구성한다”는 칸트 이론의 연관성을 보았다.
<금강경>은 일체는 무상하고 고통이고 무아이기에 고정된 관념, 이상, 개념 등으로 번역되는 산냐<상: 相>를 가져서는 안됨을 가르친 경전이다. <금강경>은 결국 무상, 고, 무아는 공(空)이라는 이유로 허무감이나 두려움을 가져서는 안되기에 결국 공하다는 고정 관념마저 극복한 중도의 지혜를 갖춰야 함을 가르친 경전이다.
나로 시작하여 나로 끝을 맺는 단순하면서도 견고한 인간의 사유구조를 떨쳐내는 작업은 곧 4상(四相: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떨쳐내는 것이다. 아상을 떨쳐 버린 사람이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벗을 수 있고 그런 사람이야말로 깨달은 사람이다. 이는 자기 사랑과 세상에의 탐닉을 극복할 것은 물론 선행 자체를 목표로 하는 선행을 할 것을 주문하는 우리 교회의 가르침과 비교할 만한 부분이다. 자기 사랑과 세상에의 탐닉을 극복하는 것은 무아인 나를 바로 보고 집착하지 말 것을 주문하는 불교의 가르침과 상통하며, 선행 자체를 목표로 하는 선행이란 무주상보시를 할 것(상 극복을 할 것)을 주문하는 불교의 가르침과 상통한다. 법의 속성이란 결국 무상, 고, 무아이기 때문에 자신은 실로 깨달은 것이 없다는 붓다의 선언은 배움과 실천의 하나로 볼 수 있다. 이는 어느 단체보다 강하게 배운 대로 실천할 것을 주문하는 우리 교회의 주문과 상통하는 바이다.
긴 읽기 여정 끝에 종착지를 밟으며 나는 내가 신봉하는 종교가 아니지만 불교 특히 <금강경>을 통해 드러난 불교와의 친연성을 확인했다. <나는 세상과 다투지 않는다> 읽기는 힘들었지만 유익한 과정이었다. |
anuloma01
2009/05/16 10:20
2009/05/16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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